김강 연재소설 ‘Grasp reflex’

/삽화 이건욱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필립의 아내가 물었다.

-당신.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뭘?

-안나 씨 뱃속의 아이. 아버님 아이 맞아요?

-당신, 정말.

-아니. 안나 씨도 아버님 아이가 맞다 말하긴 했는데. 아버님 나이가 워낙 많으셨으니까. 믿기지가 않아서. 혹시 다른 사연이 있나 하고. 당신하고는 관계없는 거죠?

-또 쓸데없는 상상. 제발 그러지 마.

-당신이 너무 챙기는 것 같아서.

-당신, 나 몰라?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당신이라도 좀 도와주면 안 돼? 어휴.

필립은 베개를 고쳐 돌아누웠다. 필립의 아내도 한숨을 쉬며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날 밤 필립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 때문은 아니었다. 영권의 일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노마는 필립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안나의 문자를 보며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문자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틈이 날 때마다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오빠로서 할 일을 했다는 뿌듯함, 필립에 대한 감사 등의 감정이 섞여 노마를 웃음 짓게 했다. 안나는 필립의 집에서 아이를 낳을 것이다. 필립은 아이를 자신의 동생으로 인정한다 말했었다. 그리고 안나의 인생은 이제 필립의 선택이 아니라 안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말을 덧붙였었다. 필립이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할게. 안나 씨는 아직 젊어. 그래서 안나 씨를 어떻게 하겠다. 안나 씨는 어떻게 해야 한다. 이런 결정을 미리 내리고 싶지 않아. 안나 씨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물론 아이는 낳아야겠지. 소중한 생명이니까. 내 동생이기도 하고. 아이는, 아이의 삶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을 거야. 우리 집안의 남자로 인정해 줄 거니까. 내가 우리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었어. 그런데, 내가 아들이 없어. 무슨 말인 줄 알겠지? 노마는 그 아이의 외삼촌이고. 그렇지?

만식이 퇴원하기 나흘 전 필립이 오른손으로 아랫배를 문지르며 했던 이야기였다.

성공적인 삶에는 몇 번의 운이 필요하지.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 아니야. 운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돈이나 의도하지 않게 발생한 기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 다행히 벌어지지 않은 일들, 분노나 좌절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하지 못한 것들, 마침 그 자리에 그가 없었다거나 누군가 끝까지 말렸다거나, 네가 앉으려는 자리에 주인이 없는 것도 너의 운이야. 이미 그 자리에 누군가 서 있다면, 그것도 네가 맞서 싸울 누군가가 아니라면 너는 그 자리에 갈 수 없는 거지. 결코. 네가 너의 정치를, 그것도 훌륭하게 해내려면 그런 운도 필요해. 하지만 그런 면에서 너는 운이 없어. 일단 내가 비켜주지 않을 거니까. 내가 너의 아비이고 너보다 먼저 정치를 시작했으니까.

이 년 전 남해였다. 영권이 인호에게 했던 말이었다. 말을 했던 영권도, 말을 들었던 인호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음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영권은 인호의 손을 잡았다.

괜찮으냐?

인호은 영권의 손을 슬며시 떼어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서울로 올라온 인호는 필립을 만났다. 인호가 필립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

많이 섭섭하셨겠네.

인호로부터 남해에서의 일을 전해들은 필립이 말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인호가 대답했다.

좌절감이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섭섭한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한잔 마시고 다 잊으시라,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일단 오늘은 한 잔 마셔요.

필립이 인호의 잔에 술을 채웠다.

형님이라고 해도 되죠? 형님은 제게 말 놓으세요. 제가 한참 어린 동생입니다.

필립이 채워주는 술을 받으며 인호가 말했다.

그전까지 인호와 필립은 아버지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인호는 영권과 함께, 필립은 만식과 함께 그렇게 네 명이 라운딩을 가진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인호와 필립이 따로 자리한 적은 없었다.

힘들지요? 뒷바라지만 하는 것. 언젠가 필립이 인호에게 말했다. 저만치 영권과 만식이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큰 양산을 받쳐 들고 그들 옆에 서 있는 캐디와 웨지 클럽을 들고 그들을 쫓아가는 캐디를 쳐다보며 필립이 인호의 어깨를 툭 쳤다.

힘들거나 마음이 편치 않을 때 전화해요. 동병상련 아닌가. 저분들 흉이라도 보게.

필립이 먼저 명함을 건넸다.

모든 곳에 인호가 있었다.

인호는 이십여 년 전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의 지역구인 영산시를 관리해 왔다. 많은 행사들에 빠짐없이 방문하여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께서 바쁘신 관계로, 하고 말을 시작하면 노인들은 바쁘시지. 큰일 하시는 분이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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