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3>
구룡포 ①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꾸덕꾸덕 익어가는 생선이 있다. 과메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과메기는 겨울 해풍을 맞으며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쫀득쫀득한 맛을 내는 포항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다. 과메기의 주산지(主産地)는 동해안의 대표적인 어업 전진기지 구룡포다. 찬바람이 불면 구룡포는 과메기의 나라가 된다. 구룡포는 과메기뿐만 아니라 숱한 이야기가 익어가는 곳이다.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고인돌 발견
1400년 전에 군마 키우던 국영 목장과
고려시대 왜적방어 위해 쌓은 성 있어
신라·고려시대 군사적 거점 흔적 남아

19세기 말까지는 한적한 어촌이었다가
일본 침탈 노골화 되면서 운명 바뀌어
풍부한 해양 어자원·포구로 좋은 입지
포항·구룡포 등에 일인 이주어촌 조성

바다 한 눈에 보이고 일본인 신사 있던
구룡포공원에 올라서면 수탈에 앞장선
도가와 야사브로의 송덕비 세워져 있어
해방 후 대한청년단원들이 시멘트 덧칠

근대문화역사거리내 근대역사관은
선어운반·대부·철공소 등으로 부자된
하시모토 젠기치 이층목조살림집으로
유세 떨쳤던 당시 생활상 생생히 확인

구룡포는 분주한 항구다. 크고 작은 어선이 수시로 물길을 가르며 포구로 드나든다. 어판장에는 오전 5시 30분 무렵이면 선어(鮮魚)를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오고, 빨간 모자를 쓴 경매사와 경매인들로 북적거린다. 6시가 되면 경매사가 종을 울리며 경매가 시작된다. 딸랑딸랑 울리는 종소리는 구룡포의 아침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다.

구룡포는 근래 텔레비전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주말이나 피서철에 구룡포의 도로는 전국에서 몰려온 차량으로 붐빈다. 구룡포는 왜 이렇게 주목을 받으며 찾아오는 사람이 많을까?

구룡포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구룡포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구룡포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있고, 1400년 전에 군마(軍馬)를 키우던 국영 목장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에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 있었다. 이런 기록을 볼 때 구룡포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군사적인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로는 눈에 띄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웃한 장기(長<9B10>)가 조선의 대표적인 유배지임을 감안한다면 바람 센 동해안 마을에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19세기 말까지 구룡포는 한적한 어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한반도를 향한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면서 구룡포의 운명은 바뀐다. 구룡포 주변의 풍부한 어자원과 포구로서의 좋은 입지 조건이 문제였다. 세상 어디나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이 좋은 곳은 침탈의 대상이 되기 쉬운데 구룡포도 그러했다. 일본은 1889년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을 체결해 경상·전라·강원·함경의 4도 해역에서 어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사전 조사를 통해 구룡포 근해에 굉장한 어자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룡포에 조성된 일본인 이주어촌

요시다 게이치(吉田敬市)라는 일본 학자가 조선총독부 수산과의 의뢰를 받아 1954년에 ‘조선수산개발사’라는 책을 냈다. 원래 1942년에 의뢰받았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조사, 연구가 힘들어져 1954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수산 분야를 어떻게 ‘개발’했는지 서술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개발’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명백히 ‘수탈’이었다. 2019년에 번역해 출간된 이 책을 펼쳐보면 포항과 구룡포에 일본인들이 언제 어떻게 들어와서 무엇을 했는지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

구룡포 앞바다에 일본 어선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02년이다. 야마구치현(山口縣) 도요라군(豊浦郡)의 어선 50여 척이 도미를 잡으려고 온 것이다. 4년 후 1906년에는 가가와현(香川縣)의 어선 80척이 고등어를 잡기 위해 출현했고, 고등어 성어기가 되자 어선과 운반선 2천여 척이 몰려왔다. 구룡포 앞바다를 일본 어선이 뒤덮은 것이다. 이에 편승하여 슬금슬금 구룡포에 자리잡은 일본인 이주자는 1933년에 220호가 되었다. 이후 정어리 어업이 성행하면서 구룡포는 그 중심지가 되었다(요시다 게이치 저, 박호원·김수희 역, ‘조선수산개발사’, 민속원, 2019, 621쪽 참조).

일본은 조선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고 조선 어민을 동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포항과 구룡포 등 한반도 연안 곳곳에 이주어촌을 조성했다. 구룡포에는 세토(瀨戶) 내해에 인접한 가가와현 사람들이 다수 이주했다. 그 이유는 해양생태 조건이 세토 내해와 비슷해 같은 어구와 어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 고려 때부터 약탈을 일삼았던 지역이라 낯익은 바다라는 점,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를 지나 자신들의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점 때문이다(김준, ‘김준의 어촌정담- 구룡포가 꿈틀댄다’, ‘현대해양’, 2021. 3. 15. 참조).

일본인들이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은 구룡포에 큰 충격을 던졌다. 항구를 만들자 더 많은 어선이 몰려왔고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상가와 주거지, 공원이 조성되었다. 20세기 초엽은 구룡포 역사에서 충격이자 분기점인 셈이다.

 

구룡포 근대역사관.
구룡포 근대역사관.

방파제 완공되면서 일본인들의 ‘엘도라도’ 돼

구룡포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은 구룡포공원이다. 계단을 따라 공원에 올라가면 구룡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큰 비석 하나가 서 있지만 비문을 읽을 수는 없다. 누군가 비문에 시멘트를 덧칠한 것이다. 이 미묘한 비석에 구룡포의 ‘슬픈 근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석의 주인공은 도가와 야사브로(十河 彌三郞)라는 인물이다. 1908년 구룡포로 온 도가와는 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 항구 건설을 주도했고 구룡포어업조합을 창립했다. 한마디로 구룡포 개발을 주도한 인물이다. 구룡포항의 핵심 시설인 방파제는 1926년에 180미터가 완공되었지만 태풍으로 파손되어 1935년에 복구되었다. 현재 방파제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1935년 3월에 세워진 ‘구룡포항 확축(擴築) 공사 준공비’가 있다.

도가와는 해산물 운송로를 확보하려고 구룡포에서 포항으로 가는 도로를 닦았다. 항만과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구룡포는 일본인들에게 ‘엘도라도’가 되었다. 구룡포의 이주 일본인들은 도가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硅化木)을 가져와 1944년에 송덕비를 세웠다. 자신들의 나라가 곧 패망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처사였다. 결국 이 비석은 우리에게 수탈과 치욕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해방된 나라에 이 비석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대한청년단원들이 비문에 시멘트를 쏟아부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구룡포공원과 근대문화역사거리(일본인 가옥거리)는 구룡포가 일본인들의 이주어촌이 되면서 조성된 공간이다. 구룡포공원은 원래 일본인들의 신사(神社)가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종로거리’ 혹은 ‘선창가’라 불린 근대문화역사거리에는 상점, 요리점, 여관, 병원 등이 즐비했다. 포항 원도심에도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있었지만 전쟁과 도시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반면에 구룡포는 전쟁의 참화를 비켜가고 개발 과정에서도 소외되면서 일본인 거주지의 형태가 웬만큼 남게 되었다. 그리고 포항시가 이를 보수하고 정비해 역사체험공간으로 조성하면서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거리에 있는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 역사관은 가가와현 출신으로 구룡포에서 큰 부를 일군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의 이층 목조 살림집이다. 하시모토는 1909년 구룡포로 이주해 다섯 척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선어 운반업, 대부업, 유비(油肥) 공장, 담배점, 철공소 등을 문어발식으로 경영해 큰돈을 벌었다. 이 집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갖고 왔을 정도다. 남의 나라에 와서 어자원을 수탈해 유세를 떨쳤던 일본 부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 집을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구룡포와 포항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을 일본이 구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구룡포와 포항의 거리는 약 20킬로미터다. 당시 일본의 기세를 고려한다면 개연성이 충분하다.

일본은 부산에서 포항까지 연결하는 동해남부선을 1935년에 완공했고, 동해중부선을 건설하기 위해 교각을 설치하고 굴을 뚫는 등 상당한 준비를 하는 도중에 패망했다. 물론 그 구상이 물거품이 되고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물러난 것은 핍박받던 구룡포 사람들에게 큰 다행이라 하겠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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