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우크라이나 교과서에 ‘한강의 기적’이 실린다. 며칠 전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대사관은 전쟁 뉴스가 아닌 교육 소식을 타전했다. 우크라이나 교육과학부는 9월 20일(현지 시간) 한국의 발전상을 교과서에 포함하도록 10학년 ‘세계지리’, 11학년 ‘세계역사’ 교육과정 가이드라인을 변경하고 홈페이지에 공지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7개월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전후 재건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달라진 전황이 이러한 생각을 우크라이나에 가져다준 것으로 보인다. 개전 초기에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속전속결 승리를 예견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현재 다윗은 잘 버티고 있고, 골리앗은 고전하고 있다.

이번 전쟁처럼 전문가들의 예측이 빗나간 경우는 드물다. 이는 군사력의 우세와 열세라는 프레임으로만 이 전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사력 세계 2위의 러시아와 22위인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이 숫자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극단적인 전쟁에서 군사력의 숫자를 넘어설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실리에만 집착했다. 그가 내세운 전쟁의 명분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는 평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평화를 원한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평화라는 가치에 세계의 여론이 움직이면서 푸틴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올여름에 개봉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전쟁의 명분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보통 이순신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忠)’의 주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는 충직함을 강조하는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한산’에서는 ‘의(義)’라는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순신은 자신이 참전하고 있는 임진왜란을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해석한다.

이 영화는 한산도대첩에서 대승한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불의에 맞선 의로운 항전에 있었음을 부각시킨다. 당시 조선에 항복한 일본인은 항왜(降倭)로 불렸다. 이 영화에서 항왜 병사가 조선의 의병들과 같은 편으로 싸우는 장면은 매우 낯설다. 그렇지만 그가 들었던 깃발에 새겨진 ‘의(義)’라는 명분은 국가의 경계마저 무화시킬 힘을 갖고 있다.

방공호 교실에서 수업하는 우크라이나 학생들이 6·25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선 한국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얻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의 오늘은 평화가 아닌 전쟁이다. 폭격으로 깨진 유리창으로 들이닥치는 찬바람을 시민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국제 사회는 두 나라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의 희생을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대의명분만이 폭력적인 전쟁을 멈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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