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6>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발산리 모감주나무 군락지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산과 강, 바다, 들판이 두루 펼쳐진 포항은 걷기에 참 괜찮은 곳이다. 내연산과 운제산을 걸어도 좋고, 형산과 제산 사이 형산강을 따라 강바람을 맞으며 걸어도 좋다. 비학산을 바라보며 흥해 들판을 걸어도 좋고, 동빈내항과 포항 운하, 송도와 영일대해수욕장을 갈매기와 함께 거닐어도 좋다. 산과 강, 들판, 바다, 도심을 따라 호젓한 길과 길이 그물코처럼 정겹게 이어져 있는 것이 포항의 매력이다.

포항에 간다면 한 번쯤 바다를 바라보며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포항은 바다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는, 바다가 근본인 도시이기에. 경상북도의 해안선 428㎞ 중 포항의 해안선은 204㎞로 거의 절반에 이르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은 100여 ㎞에 이른다. 가는 곳마다 풍경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중 포항의 색깔이 가장 짙은 길은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다. 일월동에서 시작해 호미곶광장까지 25㎞에 이르는 이 길은 쉬엄쉬엄 걸어가면 예닐곱 시간 걸린다. 홀로 걸어도 좋고 다정한 길벗과 걸어도 괜찮은 길이다.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하늘을 휘젓는 갈매기, 수평선 위의 선박들, 바닷가에서만 볼 수 있는 꽃과 나무와 암석 그리고 어촌의 지붕 낮은 집들과 선한 미소의 사람들을 드문드문 만날 수 있다. 4개 구간으로 된 이 길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영혼의 순례길로 모자람이 없다.

 

포항의 색깔이 가장 짙은 곳으로 일월동에서 시작해 호미곶 광장까지 25㎞ 에 이르러

쉼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갈매기들·수평선 위의 선박· 어촌의 지붕 낮은 집들 정겨워

홀로 걸어도 좋고 다정한 길벗과 걸어도 괜찮은, 쉬엄쉬엄 걸어가면 예닐곱 시간 걸려

바다 위로 길나있는 선바우길·아홉마리 용이 살다 승천했다는 구룡소길 등 자연 만끽

연오랑세오녀길

연오랑세오녀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의 무대로 일월동 713번지에서 시작해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의 귀비고까지 6.1㎞에 이른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 때 연오와 세오라는 부부가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가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세오가 짠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빛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다. 국보로 삼은 비단을 모신 창고가 귀비고이고,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 영일현이다.

좋은 문학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선사한다. 이 설화 또한 다양한 해석이 열려 있는데, 영일만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과 일본의 이즈모(出雲) 지방 사이를 오고 간 태양신화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연오(延烏)와 세오(細烏)의 ‘까마귀 오(烏)’는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양오(陽烏, 태양) 전설과 연결되고, 영일현(迎日縣)이라는 지명도 태양신화와 이어진다. 포항의 이야기는 이렇듯 포항의 땅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 해와 달을 품고 수평선 너머의 세력과 교류하고 혼융된 것이 포항의 역사이자 문화다.

이육사의 대표작인 ‘청포도’도 이 길 위에서 탄생했다. 지금 해병 사단과 그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 200만㎡(60만 평)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포도 농장이 있었다. 1936년 이육사는 요양차 포항에 들렀다가 이 포도농장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청포도’를 구상했고, 1939년 8월호 ‘문장(文章》’지에 발표했다. 이육사의 또 다른 대표작 ‘광야’는 항일 지사의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는 반면에 ‘청포도’는 다양한 상징과 서정성 때문에 ‘광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다음의 글을 읽어 보면 이육사가 ‘청포도’를 얼마나 아꼈는지, 그리고 이 작품에도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향한 염원이 얼마나 강렬하게 깔려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3년 7월에 경주 남산의 옥룡암으로 요양차 들렀을 때, 먼저 와서 요양하고 있던 이식우(李植雨)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스스로 “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하면서,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이식우에게 말했다고 한다.

- 김희곤, ‘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199쪽.

이 시에 나오는 청포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연두색 청포도가 아니다. 당시 품종으로서 청포도가 포항의 미츠와(三輪) 포도원에서 양조용(釀造用)으로 재배되기는 했겠지만, 시에서처럼 손님 접대용으로는 거의 재배되지 않았다. 품종으로서 ‘청’포도가 아니라 익기 전의 ‘풋’포도여야 시가 제대로 독해된다(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다시 읽는 이육사’, 창비, 2017, 73∼74쪽 참조).

선바우길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백사장과 해안의 몽돌, 자연석을 그대로 둔 채로 길을 냈다. 길이 끊어진 곳에는 데크를 놓아 길을 이었다. 바다 위로도 길이 나 있는 것이다. 데크 위를 걸어가면 발밑으로 파도가 철썩거린다.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선바우길 구간이다. 동해면 입암리에서 시작해 흥환해수욕장을 지나 흥환어항까지 6.5㎞에 이르며, 아름다운 바위와 절벽, 데크로드의 묘미를 한껏 누릴 수 있는 코스다.

이 길에서는 태곳적부터 바람과 파도에 깎인 바위들이 기묘한 모습으로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 선바우를 비롯해 폭포바위, 여왕바위, 소원바위 등을 만날 수 있으며, 주상절리와 ‘한디기’라는 이름을 가진 하얀 절벽도 조우할 수 있다. 바위 구석에는 바다의 국화로 불리는 해국(海菊)이 수줍은 듯이 피어 있다. 다른 꽃들은 시나브로 시들어가는 가을에 피어나 겨울까지 빛나는 해국은 잎맥이 선명하기 그지없다. 누워서 자란다고 하여 누운향나무로도 불리는 눈향나무도 볼 수 있다. 붉은 해당화는 5월이 되면 바닷가에 지천으로 피었는데 이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희귀종이 되었다.

 

독수리 바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독수리 바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구룡소길

구룡소길은 흥환리 어항에서 출발해 발산리를 거쳐 대동배까지 6.5㎞에 이르며 정감 어린 어촌 마을과 천연기념물인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 장군처럼 우뚝 서 있는 장군바위를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바닷가에 가더라도 오래된 어촌을 보기가 쉽지 않다. 빛바랜 흑백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어촌이 이 길 위에 있다. 마을 앞 포구에는 작은 어선이 정박해 있고, 길가에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어망과 통발 같은 어구를 손질하는 어민의 손길이 분주하다. 계절에 따라 멸치, 오징어, 과메기 등을 말리는 풍경도 볼 수 있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걷다 보면 기암절벽과 움푹 팬 소(沼)를 이따금 만날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구룡소(九龍沼)다. 높이 40∼50m, 둘레 100여 m에 이르는 구룡소는 해안 절벽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 주변의 움푹 팬 흔적은 용이 승천하면서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구룡소를 보고 있으면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실감 나는 풍경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풍어제나 출어제를 지낼 정도로 신성하게 여긴다.

발산리에는 6월이 되면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노란꽃이 피는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다. 종자를 염주로 만들기에 염주나무라고도 하는데, 서양에서는 ‘황금비를 뿌리는 나무(Golden rain tree)’라고 한다. 꽈리처럼 생긴 열매는 옅은 녹색이었다가 열매가 익으면서 짙은 황색으로 변한다. 하얀 꽃이 피는 모습이 병아리를 떠올리게 한다고 하여 병아리꽃나무라고 하는 나무도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다. 발산리의 병아리꽃나무와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 제371호에 지정되어 있다.

호미길

호미곶면 구만리 산39에서 시작해 호미곶 해맞이광장까지 5.3㎞에 이르는 호미길에서는 ‘까꾸리개’라는 독특한 지명이 눈길을 끈다. 과거에 과메기의 원조인 청어가 얼마나 많았던지 뭍으로 밀려 나오는 경우가 허다해 갈퀴(까꾸리)로 끌었다고 한다. ‘까꾸리개’의 ‘개’는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어귀로, 포구(浦口)를 뜻하는 지명에 쓰인다. 즉 ‘까꾸리개’는 청어 떼를 갈퀴로 쓸어 담은 포구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사실에 가깝다. 과거에 영일만과 호미곶 일대에서 청어와 정어리 등의 어획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까꾸리개’는 호미곶 앞바다에 청어를 비롯한 고기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말해주는 지명이다.

‘까꾸리개’에서는 독수리 머리처럼 생겨서 독수리바위라고 불리는 암석이 길손들의 시선을 붙들어 맨다. 특히나 바다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곳이어서 해 질 녘에 길손들의 발길이 잦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바다에서 육지로 향하는 거대한 계단을 볼 수 있다. ‘해안단구(海岸段丘)’라고 하는 이 계단은 바다와 땅이 움직이면서 만들어진 아주 특별한 지형이다. 호미곶 일대는 계단 모양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안단구로 손꼽힌다. 이처럼 이 길에서는 억겁의 세월에 걸쳐 하늘과 바다와 땅과 바람이 어울리며 빚어놓은 기묘한 자연현상을 만끽할 수 있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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